김초엽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공상에 감성을 더해 현실을 빗대면>

'감성 SF', 요즘 나와 비슷한 또래 작가들의 SF를 나는 그렇게 부른다. 정세랑과 김초엽으로 대표되는 젊은 바람은 장르의 진입장벽을 허물고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인간적인 감성과 보편적인 정서로 다가간다.

 

김초엽을 생각하면 테드 창이 떠오른다. 컴퓨터 공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여 소설 작가와는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극이과생'의 소설은 전 세계 장르 소설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이력은 김초엽과 닮았다. 포항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원이었던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침체된 국내 SF계에 등장했다. 이런 '고위 공대생(?)'들의 소설은 한층 더 이과스럽고 기술적일 것 같았지만 오히려 정 반대였다. 아마 알았을지도. 내가 설정한 이 아름다운 세계의 물리법칙을 이해할 독자는 많지 않다는 걸. 그래서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닮아있다.

너무나 발달한 공상속 세계관은 굉장히 매력적이고 구미가 당긴다. 잘 정립된 세계관은 하나의 프랜차이즈로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파생하는 기반이 되었지만 여전히 매니아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김초엽은 세계관을 피력하지 않는다. 어떤 세계인지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 간략하게 언급될 뿐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공상 속 기술이 당연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책 한권에 여러 단편을 엮어내는 형태다. 단편 하나하나마다 여러 가지 뚜렷한 주제를 전달한다. 그 세계는 마치 완전고결한 파라다이스 같지만 그런 세상은 무엇인가 뒤틀려 있다. 기술의 발전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기저에 깔린 관념을 그리고 인간을 바꿀 수 없음을 피력한다. 곧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음을 자각하게 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보랏빛을 경험했다. 보라색은 파스텔이면 신비롭지만 진하면 공허하다. 책 속의 세계들은 너무나 신비롭고 흥미진진해서 책을 덮고 침대에서 눈을 감으면 그 세계를 상상하느라 잠을 뒤척였다. (극N입니다) 하지만 이내 땅 속에서 부글부글 부풀어 오른 진한 보라색 점액처럼 드러난 추악함이 나의 흥분된 공상을 산산이 부쉈다. 김초엽은 다른 이야기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 과정을 반복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세상이라고. 완벽한 세상은 없다고. 있다면 뒤틀린 세상이라고.

 

ps :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공생가설'이다. 우리가 7살 이전의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한 류드밀라의 이야기는 정말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하루 종일 망상하는데 재료를 왕창 공급해주었다. 이 주제라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도 설명이 가능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가장 동화같은 이야기지만 약간은 잔혹동화 같달까... 스포는 하지 않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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