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Arrival) 스포일러 리뷰
- 영화
- 2017. 2. 12. 23:54
* 인문학과 SF의 결합
본 포스트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우주 영화나 드라마를 매우 좋아합니다.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처럼 거대한 우주선과 외계인이 나오기만 하면 일단 가서 봅니다. 그래서 남들이 쪽박 작품이라고 하는 것들도 우주가 배경이면 일단 괜찮게 평하는 편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우주에 대해 단순히 공상적으로만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인문학과 SF를 결합한 영화들을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전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콘택트(1997) 등을 보면서 이런 장르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는 정말 공부하기 싫은데 책상 앞에 앉아있는 학생처럼 몇 번을 졸다가 깨어났는지 모릅니다. 이런 영화는 대게 호화찬란한 장면은 없고 시종일관 느슨한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조각의 퍼즐들이 합쳐지며 무엇인가 일어날 때 그저 일반 킬링타임 무비처럼 따라오기만 한 사람은 “뭐야 이거?”라는 반응을 토해냅니다. 저도 처음에는 똑같은 경험을 했고 인터넷에 ‘OOO 결말’이라고 검색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찾아본 결말은 그 블로거의 결말을 하나의 결말이라고 결정짓고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결론이든 남들이 생각했던 결말이든 나만의 결론을 내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난 이후 보는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영화도 장르에 따라 보는 방법이 다르듯이 저만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론에 영화에서 제시하는 가설을 대입하여 검증해나가는 방식입니다. 이런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들은 사소한 것도 다 단서이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회상되거나 비치는 것들은 반드시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건 왜 계속 보여주는 걸까?, 왜 답답하게 저러지? 라는 의심을 통해 나만의 단서를 수집하고 가설을 세워나가면서 보는 중간중간 검증하고 혹시 아닌 것 같으면 또 다른 가설을 세워보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틀리면 틀린 대로 나름의 결말을 얻을 수 있고 어느 정도 들어맞으면 한 단계 발전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 언어학자 루이스와 과학자 이안
컨택트의 원제는 Arrival입니다. 기본적인 뜻으로는 도착이지만 저는 사전 세 번째 뜻인 ‘도래(到來) :: 이르러 닥쳐옴’이 가장 어울리는 의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계 우주선이 지구에 도착하면서 지구인에게 이전까지 없었던 위기가 닥쳐옵니다. 그것은 개인, 집단, 국가를 가리지 않지만 컨택트에서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췄습니다. 카메라는 오직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언어학자 루이스가 처음 보여준 반응은 ‘나와는 상관없다’였습니다. 그 예로 하늘에 거대한 우주선이 떠 있는데 다음날 일상과 같이 강의를 하려고 강단에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외계인이 지구에 오면 정말 영화처럼 우왕좌왕하는 사람만 있을까? 그 외계인과의 조우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떨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울 상공에 우주선이 떠 있어도 출근은 계속되지 않을까? 어차피 그것은 정부의 일이지….‘ 같은 웃픈 생각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루이스는 외계인이 자신의 업무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책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것은 책임이 부과되어야 자기 일로 인식하고 덤비는 인간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 언어 교류의 새시대를 열다.
컨택트는 과학적 이론을 통해 외계 지적 생명체에게 다가가기보다는 언어학을 통해 시간의 차원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본격 언어 교류의 장을 열어 의사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루이스는 이들의 언어가 표의문자이며 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확신을 내립니다. 저는 이때 앉은 자리에서 한자를 생각했습니다. 한자는 지구 상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표의문자이며 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또한, 루이스가 파악한 대로 문자에 시간의 순차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도 한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한자를 모티브로 삼은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시간에 대한 관점이 언어와 관련이 있다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영화는 직접 루이스의 입을 통해 사피어의 ‘언어 우위론적 관점’을 베이스로 하겠다는 암시를 던져 줍니다.
언어 우위론적 관점
사피어(Sapir): “인간은 객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워프(Whorf): “언어는 우리의 행동과 사고의 양식을 결정하고 주조한다.”
사고 우위론적 관점
피아제(Piaget, Chomsky): 사고(思考)가 언어보다 중요하며 사고가 언어에 영향을 준다. 사고 능력의 발달이 언어 능력보다 선행되어야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
두 가지 관점의 공통점은 언어와 사고가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이지만 언어 우위론적 관점의 핵심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무지개에 어떤 색깔이 보이냐고 무심코 물어보면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보고 생각하면 약간 누리끼리하거나 시퍼런 다른 색도 보이는데 무슨 말이냐? 이것은 사고 우위론입니다.
* 외계인들의 문자
그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외계인들이 남긴 말은 3000년 뒤에 인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신들의 문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오해했던 “무기를 준다”의 무기는 자신들의 언어였습니다. 언어가 왜 무기인가는 인간이 한 단계 진화된 지적 생명체로 나아가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시간을 다르게 인식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컨택트에서는 과학 기술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무기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외계어를 배우면서 기이한 경험을 하는 루이스
컨택트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단순 일방향적 시제 표현이 없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이론에 따라 시공간을 초월해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을 루이스를 통해 보여줍니다. 그들의 언어를 배울수록 딸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처음에는 다른 시간처럼 느껴졌던 것이 나중에는 자신이 곧 그곳에 있음을 인지합니다. 자신이 있는 그곳이 바로 현재이자 미래이자 과거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확신한 장면은 미래에서는 자신이 낳은 딸의 성장을 바라보며 나레이션을 하는 과정에서, 현재에서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이안이 남편임을 자각하면서, 현재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외계어 전문가가 되어있는 시점에서는 중국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의 귓속말을 통해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 딸과 함께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치 있었던 일처럼
루이스가 장막을 들추고 미래를 엿보았지만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이안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여 딸을 낳는 것은 왜일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들의 언어를 배운 루이스의 사고 자체가 시간을 다르게 인지하면서 내가 인지하고 있는 사건들이 어떤 시점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지만 또 다른 시점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외계인을 만나고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외계어 전문가로 성공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딸이 병에 걸려 죽는 것과 남편 이안이 자신을 떠나는 것 이런 나열된 사실을 루이스가 인지했을 때는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진정한 미래가 아닌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차라리 그 과정을 소중히 여기기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루이스는 인간 기준으로는 미래를 엿본 것이지만 그들 기준으로는 미래를 엿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루이스가 그들의 언어를 파헤치다가 “그들은 한 방향으로만 과거를 보지 않는다, 또는 그들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고 말한 데서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과거-현재-미래는 동시에 진행되는 순환 고리'라는 해석이 주류인 것으로 알지만 진정한 미래는 정말로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타임머신이 아닌 이상 그들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미래는 선택의 연속이고 그들도 과거 여행을 통해 인간을 계몽시켜 영화 시점에서 3000년 뒤의 미래에 도움을 받겠다는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3000년 뒤의 미래에 그들 종족에게 닥친 위협도 루이스의 딸 사망과 같이 이미 결과가 있는 일이라면 굳이 인간에게 가는 선택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다만 컨택트는 인간의 언어 시제 체계에 지배받는 지구인들 입장에서야 분명한 미래이지만 그들 기준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그들은 과거가 단순히 뒤로 돌아간다는 일방향적 의미가 아닌 앞으로도 갈 수 있는 양방향적 의미로 인식하고 있으며 실제로 여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고는 그들이 가진 시간의 범위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이면 어디 까지가 이미 일어난 결정된 미래이고 어디 부터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진정한 미래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적어 내려가다 보니 글이 길어졌네요. 본 포스트는 저의 주관적인 해석을 담고 있으며 다른 의견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분명히 감독이 원한 것은 '니가 생각하는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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